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서구의 잠식 === ||[[파일:external/3.bp.blogspot.com/nam+dinh+battle.jpg|height=300]]|| ||베트남을 침공하는 프랑스 군대|| 민망 황제는 1841년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직후 캄보디아에서 반란이 다시 일어나 결국 베트남에서 떨어져 나갔고, 민망 황제를 이어 황위에 오른 장남 [[티에우찌 황제]]는 전대에 비하여 유약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티에우찌 황제의 6년간의 재위기 동안 베트남의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인구는 30년 만에 6백만 명에서 1,000만명으로 급증한 것에 반하여 식량 생산량은 생각보다 증가하지 않았다. 각종 역병들과 기아, 자연재해들이 연달아 겹쳐 일어났고, 1802년부터 1862년 사이에 베트남에서는 무려 405건에 달하는 무수한 반란들이 일어났다. 예전에 망한 [[후 레 왕조]]의 추종자들, 응우옌 왕조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무슬림이나 소수민족 등 다양한 계층의 불순분자들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응우옌 왕조의 국력을 갉아먹었고, 이는 베트남이 후에 서양 열강들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주었다. 한편 티에우찌 황제 시기에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서구 세력들과 대립하기 시작한다. 당시 베트남은 민망 황제 이래로 억압적인 종교 정책을 유지하면서 가톨릭 선교사와 신자들을 박해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르페브르 주교가 사로잡히면서 서구 열강들에게 간섭의 꼬투리가 잡힌 것이다. 19세기 중반엔 전 국토에 천주교 신도가 45만명으로 늘자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지배층에겐 독이 되었고, 이들은 가톨릭 교도들을 '역도'로 몰아 탄압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26일, 프랑스는 베트남이 선교사를 박해하는 것을 구실로 다낭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프랑스 선교사 5인과 주교의 석방을 요구한다. 티에우찌 황제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선교사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고, 프랑스 함대는 3월 16일 다낭을 떠났다. 그러나 4월 15일 프랑스 함대는 다시 선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다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대 5척을 격파시켰다. 그 결과 베트남은 사망자 40여 명, 부상자 90여 명, 실종 1,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티에우찌 황제는 이미 약속대로 선교사들을 석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격노하였으나, 군사적인 힘에서 밀려 대책이 없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다른 서구 열강들도 베트남을 건드리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컨스티튜션함|USS 컨스티튜션]]이 [[다낭]]으로 쳐들어와 지방관들을 포로로 잡고 르페브르 주교를 석방하라고 요구했으며 그해 가을에는 또다시 [[영국]] 함대가 들어와 마음대로 앞바다를 휘젓고 다니며 베트남과 통상 조약을 새롭게 맺을 것을 강요했다. 결국 그해 1월에 티에우찌 황제는 아들 [[뜨득 황제]](Tự Đức, 嗣德)에게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는 분노에 찬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티에우찌 황제 사후 제위에 오른 [[뜨득 황제]] 역시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유약했다. 티에우찌 황제의 아들들 중 둘째였던 뜨득 황제는 집권 직후부터 제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형의 쿠데타로 인해서 왕권에 큰 타격을 입어 민심이 흔들렸고, 아버지의 쇄국 정책을 이어받아 문을 닫아걸고 외세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하려 노력하였다. 뜨득 황제는 미국, 프랑스, 영국 할 것없이 모든 서구 영사관을 폐쇄하고 서양인들을 추방한 다음, 가톨릭에 대한 포교 억압정책을 갱신하면서 대대적인 박해 정책을 펼쳤다. 이 뜨득 황제의 첫 12년 동안 베트남 가톨릭은 역사상 최악의 탄압을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1840년부터 20년간 순교당한 유럽인 선교사가 27명, 베트남인 사제가 300명이며 신도는 3만 명에 달했다. 이들이 살던 마을도 역도의 마을이라 하며 파괴됐다. 이때 선교사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는데 프랑스 선교사인 조제프 마르샹(Joseph Marchand, 1803 ~ 1835)은 살을 집게로 뜯겨져 죽는 능지형에 처해지고 피에르 뒤물랭보리(Pierre Dumoulin-Borie, 1808 ~ 1838)는 참수되었으며 장샤를 코르네(Jean-Charles Cornay, 1809 ~ 1837)는 참수되고 시신이 토막나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서구 열강들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시기에 베트남에는 연이어 흉작과 기근, 가뭄과 자연재해들이 겹쳐 일어났다. 1840년대 후반에는 [[콜레라]] 대유행으로 인해 인구의 8~10%인 80만 명이 사망하여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1854년에는 [[메뚜기]] 떼가 밭을 휩쓸어 북부 지방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굶어죽었고 통킹 만 인근에서는 반란이 연이어 일어나 지방 시설들과 농경 산업이 초토화되었다. 이를 해결해야 할 베트남 조정은 무력했으며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조정이 갈수록 약해지자 1850-70년대에 서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돌아온 신진 유학파들의 개혁 요구가 거세졌다. 이들은 베트남의 문호를 개방하고 모든 체제를 서구식으로 바꾸어 대대적인 개혁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것은 보수적인 [[유교]]를 신봉하던 세력이었고, 결정적으로 뜨득 황제 역시 골수까지 유교적 봉건제에 물들어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큰 성과는 보지 못했다. 덕분에 당시 베트남 인구의 95%는 시골의 농촌에 흩어져 살았고,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동시대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경제 구조 안에 갇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